은퇴 준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몇 해 전 아버지가 퇴직 후 목돈을 어딘가에 넣어두려고 이것저것 알아보시던 모습입니다. 수익률이 높다는 상품들을 들고 오셨는데, 정작 그 상품이 언제 얼마를 돌려받는 구조인지, 원금이 보장되는지는 잘 모르셨습니다. 수익률 숫자만 보셨던 겁니다.
ETF를 은퇴 준비 목적으로 공부할 때도 같은 함정이 있습니다. 어떤 ETF의 최근 수익률이 높다는 이유로 선택하면, 정작 그 ETF가 은퇴 준비에 맞는 성격인지는 확인하지 않게 됩니다. 은퇴 준비 관점에서 ETF를 볼 때는 수익률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기준이 따로 있습니다.
기준 1. 변동성을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ETF 투자에서 손실이 일시적인지 영구적인지는 보유 기간이 결정합니다. 시장이 30% 빠져도 10년 이상 기다릴 수 있다면 회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3년 안에 그 돈이 필요하다면,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손실을 확정하고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40대 중반이라면 은퇴까지 15년 이상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기간이 뒷받침된다면 주식 비중이 높은 ETF도 선택지가 됩니다. 반면 은퇴가 5년 이내로 다가온 경우라면, 변동성이 큰 ETF의 비중을 점진적으로 낮추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 부분은 개인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지므로, 구체적인 자산 배분은 공인 재무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기준 2. 이 ETF가 하락할 때 얼마나 빠지는가
수익률 차트를 볼 때 오른 구간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퇴 준비 관점에서는 빠진 구간을 함께 봐야 합니다. 최대 낙폭(Maximum Drawdown)이 얼마였는지가 중요한 기준입니다.
예를 들어 나스닥100 ETF는 2022년에 고점 대비 약 33% 하락했습니다. S&P500 ETF는 같은 기간 약 19% 하락했습니다. 두 ETF 모두 이후 회복했지만, 하락 폭이 컸던 기간에 은퇴를 맞이한 사람이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최대 낙폭은 운용사 홈페이지나 ETF 정보 제공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거 데이터이므로 미래 하락 폭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이 ETF가 나쁜 시장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기준 3. 분배금이 필요한 시점인가, 성장이 필요한 시점인가
은퇴 준비 단계와 은퇴 이후 단계는 ETF를 보는 기준이 다릅니다.
은퇴까지 10년 이상 남아 있는 ‘준비 단계’라면 분배금을 받아서 쓰는 것보다 자산을 키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분배금을 재투자하면서 복리 효과를 쌓아가는 구조가 맞습니다. 분배금이 높은 ETF보다 성장성이 있는 ETF가 이 단계에 더 맞을 수 있습니다.
은퇴 이후 ‘인출 단계’가 되면 매월 또는 분기마다 현금이 필요해집니다. 이 단계에서는 분배금이 정기적으로 나오는 ETF가 현금 흐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분배금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ETF를 고르면 안 됩니다. 분배금의 재원과 ETF 전체 수익률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기준 4. 운용보수가 장기 투자에 적합한 수준인가
은퇴 준비는 10년, 20년 단위의 장기 투자입니다. 이 기간 동안 운용보수가 누적되면 실질 수익률 차이가 커집니다. 같은 지수를 추적하는 ETF라면 운용보수가 낮은 쪽이 장기적으로 유리합니다.
운용보수 확인 방법과 장기 투자에서 보수 차이가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11번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기준 5. 하나의 ETF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은퇴 준비 자산을 하나의 ETF에 집중하면 그 ETF가 추적하는 지수의 흐름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S&P500 하나에 집중하는 것도, 나스닥100 하나에 집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산의 성격이 다른 ETF를 함께 보유하면 시장 충격이 왔을 때 전체 손실 폭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식 ETF와 채권 ETF를 함께 보유하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다만 어떤 비율로 보유할지는 개인의 나이, 위험 허용 수준, 은퇴 시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반적인 원칙은 있지만 개인에게 맞는 배분은 재무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50대 이후로 가면서 비중 조정이 왜 필요한지는 [22번 글]에서 따로 다룹니다.
수익률은 결과이고, 기준은 과정입니다
은퇴 준비용 ETF를 고를 때 수익률은 참고 자료입니다. 기준이 아닙니다. 변동성을 버틸 기간, 최대 낙폭, 현재 단계(준비 또는 인출), 운용보수, 집중 위험. 이 다섯 가지를 확인한 뒤 수익률을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투자 목표를 먼저 세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는 [17번 글]에서, 생활비와 투자금을 어떻게 분리할지는 [19번 글]에서 이어서 다룹니다.
오늘 확인할 것이 있다면 하나입니다. 지금 관심 있는 ETF 하나를 골라서 운용사 홈페이지에서 최대 낙폭 수치를 찾아보십시오. 그 숫자만큼 계좌가 빠져도 팔지 않을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은퇴 준비 ETF 선택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