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 개설을 마친 날 밤, 앱을 열고 S&P500 ETF를 검색했습니다. 가격을 보고, 수량을 입력하고, 매수 버튼 바로 앞까지 갔습니다. 그러다 멈췄습니다. 왜 이걸 사려는지 이유를 딱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좋다고 하니까’가 전부였습니다. 그날 버튼을 누르지 않은 것이 지금 돌아보면 잘한 일이었습니다.
계좌를 만들고 나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준비를 오래 했으니 이제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 가격이 오르기 전에 사야 한다는 조급함. 이 두 가지가 겹치면 확인도 안 된 상태에서 첫 매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매수가 나중에 가장 후회되는 매수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좌 개설과 투자 준비는 다른 단계입니다
계좌를 만드는 것은 투자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투자를 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것입니다. 은행 통장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날 바로 적금을 들거나 대출을 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 ETF 투자에서 계좌 개설 이후에 해야 할 확인이 남아 있습니다. 이 순서를 건너뛰면 나중에 시장이 조금만 흔들려도 판단 기준이 없어서 감정적인 결정을 하게 됩니다. 처음 한 번 제대로 확인해두는 것이 이후 수년간의 투자를 안정적으로 만드는 토대가 됩니다.
계좌 개설 직후 확인해야 할 것들
첫째, 지금 넣으려는 돈이 투자 가능한 돈인지 다시 확인합니다.
계좌를 만들고 나면 입금부터 하고 싶어집니다. 그전에 지금 넣으려는 금액이 3년 이상 묶여도 생활에 지장이 없는 돈인지 한 번 더 확인합니다. 계좌가 생겼다는 이유로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계좌는 있지만 돈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입금을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둘째, 수수료와 세금 구조를 한 번 확인합니다.
해외주식 수수료, ETF 운용보수, 양도소득세 신고 시점. 이 세 가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매수하면 나중에 예상치 못한 비용이 나왔을 때 당황하게 됩니다. 항목별 확인 방법은 [5번 글]에서 정리해두었습니다. 처음 한 번만 읽어두면 됩니다.
셋째, 소액으로 환전 과정을 먼저 경험합니다.
큰 금액을 바로 환전하기보다, 처음에는 소액으로 원화를 달러로 바꾸는 과정을 경험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환전 메뉴가 어디 있는지, 적용 환율이 어떻게 표시되는지, 환전 후 달러 예수금이 어떻게 반영되는지 직접 확인해두면 이후 거래에서 실수가 줄어듭니다.
넷째, 주문 방식과 거래 시간을 확인합니다.
지정가와 시장가 주문의 차이, 미국 장이 열리는 시간을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면 첫 매수 전에 짚어두십시오. 주문을 넣었는데 밤새 미체결로 남아 있거나, 원하지 않는 가격에 체결되는 상황을 미리 막을 수 있습니다.
첫 매수에서 흔히 하는 실수
계좌 개설 직후 첫 매수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있습니다.
수익률이 높은 ETF를 고릅니다. 최근 1년 수익률이 가장 높은 것을 사면 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최근 수익률이 높다는 것은 이미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거 수익률이 앞으로도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뉴스에서 본 종목을 삽니다. 어딘가에서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주변 사람이 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같이 사고 싶어집니다. 그 정보가 이미 가격에 반영된 이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꺼번에 큰 금액을 넣습니다. 처음이라 조심스러우면서도, 막상 계좌가 생기면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자’는 생각에 목돈을 한 번에 넣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날이 시장 고점이었다면 이후 하락장을 버티는 것이 심리적으로 훨씬 어렵습니다.
이 세 가지 패턴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첫 매수에서 피할 수 있는 실수가 줄어듭니다.
투자 목적표를 먼저 작성합니다
첫 매수 전에 하나만 더 해두면 좋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왜 투자하는지, 언제까지, 어느 정도 금액을 목표로 하는지 한 문장으로 적어두는 것입니다. 거창한 문서가 아니어도 됩니다. 메모 앱에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이 문장이 있으면 시장이 하락했을 때 “내 투자 기간은 10년이고 지금 팔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가능합니다. 없으면 불안이 판단을 대신합니다. 투자 목적표를 처음 작성하는 방법과 항목은 [8번 글]에서 다룹니다.
준비 항목을 한 번에 점검하고 싶다면 [6번 글]의 체크리스트를 먼저 확인해두십시오.
계좌는 오래 쓸 도구입니다
계좌를 만든 날 바로 매수하지 않아도 됩니다. 계좌는 내일도, 한 달 뒤에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준비가 됐을 때 쓰면 됩니다.
서두르는 이유가 “가격이 오를 것 같아서”라면, 그 판단 근거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그것은 조급함이지 판단이 아닙니다. 조급함으로 한 첫 매수는 나중에 흔들릴 때 버티는 힘이 가장 약합니다.
오늘 계좌를 만들었다면, 오늘 할 일은 매수가 아닙니다. 위에서 확인하지 못한 항목 중 하나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